경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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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by imakemylifebeutiful 2020.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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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경애 씨, 일본에서는 서툰 어부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만 능숙한 어부는 안개를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안개가 안 끼도로고 잘 살면 됩니다. 지금 당장 이렇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거 안무서워하고 삽시다

2. 길게 쓰인 자기소개서에서 경애는 자신의 가정 환경을 '대대로 어렵습니다. 효도하고 싶어요'라는 문장으로 짧게 요약했다

3. 경애는 그런 마음에 대해서 꽤 잘 알았다. 그러니까 현실의 효용가치로 본다면 애저녁에 버렸어야 했을 물건들을 단지 마음의 부피를 채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말이다.

4. 경애는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게 만들 수 있는가

5. 그런 식으로아이들을 죽게 하는 창조주라면, 그런 비극을 기꺼이 만들어내는 창조주라면 그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6. 발화지점은 건물 지하였고, 불이 번지기까지 분명 시간이 있었는데도 그 많은 아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놀란 아이들이 출입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술값을 받지 못할까 걱정한 호프집 사장이 문을 잠갔기 때문이다

7. 결국 경애가 고른 것은 작은 부채였는데, 거스름돈을 받느면서 경애는 잠깐 그 여자의 손을 스치듯 잡아보았다

8. 하지만 상수의 떠들썩한 열의와 연극적인 액션은 누군가의 입김? 이를테면 공상수씨, 거 좀 조용히 하라고, 통화중인데, 하는 부장의 목소리만 들려와도 시무룩하게 꺼져버릴 것이었다.

9. 형은 아버지는 그냥 알코올 중독이야, 라고 말했다. 재기를 노리는 정치인도, 후학 양성에 힘쓰던 노교수도 아닌 그냥 알코올 중독자로 늙어가고 있다고.

10.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11. 그렇게 남들을 한번 보면 자기가 얼마나 필요 이상으로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는지, 마치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않느면 안되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웅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12. 마치 둘이 여전히 연인이었을 때 처럼 전화를 받자마자 여보세요, 라든가, 선배 혹은 경애야, 하고 부르지도 않고 응, 가는 길이야, 왜, 밥먹었어? 하면서 곧장 일상적인 대화로 들어가는 것이, 헤어질 때는 내일도 또 볼 테니가 아쉬움이나 대단한 안녕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13. 은총은 여기 납골당의 가 34호 칸
14. 그리고 그날밤 그걸 다 게워내고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혼자 침대에 걸터앉아 이런 문장을 일기에 써보았는데, 상수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문장이었던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되고 만다"였다. (중략) 그런 장면을 연상하다가 상수는 마침내 괄호 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이 되고 만다"라고 문장을 완성했다.

15. 상수는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묵 같은 상태의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겉으로는 중량감 있는 색채에, 기포 하나 없이 단단해 보이지만 숟가락질 한 번으로 완전히 파괴되어버리는 묵 같은 인생.

16. 전화기 너머로 미유의 딸이 옹알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내는 소리는 아름다워서 때로는 어떤 풍경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경애는 생각했다

17. 다만 그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들려달라고 했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혼자만 간직하는 것은 너무 고독한 일이니까.

18. 나는 아마 E와 처음 자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아마 꽤 괜찮은 파트너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어? 무슨 근거로?
그렇지 않아? 나와 하는게 별로아?
아니지, 전혀 아니야.
사실 나는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어, E에게.
자자고?
자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뭐라고 했어?
그러면 아주 따뜻하겠네, 라고 했어,
얼마나 따뜻할까, 하고.
한동안 따뜻하다는 말을 쓸 수가 없었어, 기억이 나서,
그런데 그 말이 아니라 그렇게 일상적으로 써야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어. 이를테면 경배 같은 단어, 그런 단어는 자주 쓰지 않으니까 불편할 것이 없잖아. 숙고 같은 말도 있겠지, 그런 말 따위는 쓰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그런데 따뜻하다는 말은 어쩔 수가 없었어. 이 밥이 따뜻하다. 그런데 E가 죽고 나서는 따듯하다, 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따뜻하지가 않아졌어, 따뜻하면 안되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러면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말을 삼키고 밥이 먹을 만하다고 정정하면서 그런 몸은 어떻게 되는 건가 생각했어. 그러니까 거기서 3도 화상을 입고 겨우 살아님은 알바하던 애가 자기 엄마를 붙들며 했다는 말, 엄마,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왜 나는 죽지 않아, 대체 사람은 얼마나 아파야 죽는거야. 그런데 E는 죽었잖아, 죽을 정도로 아팠다는 거잖아. 선배, 나는 그걸 떠올리면 무언가를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대체 내가 뭘 용서할 수 없는디는 모르겠어. 나는 뭘 용서해야 하는거야,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거야, 누가 있는거야.

19. 상수는 이따금 죽은 어머니와 나눈 대화들을 맥락 없이 떠올리는데 그 중 하나가 엄마, 엄마는 뭐가 어려워?하고 물으면 어머니가 설핏 웃으면서 오늘이 어려워,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
오늘이 왜 어려워?
오늘을 넘겨야 하니까 어려워.
오늘을 넘긴다는 것은 뭐야?
오늘을 견딘다는 것이지
오늘을 견딘다는 것은 뭐야?
그건 오늘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거야
오늘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뭐야?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뭐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거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 뭐야?
내일은 못 견딘다는 것이지
내일을 못 견디면 어떻게 되는데?
내일을 넘길 수 없게 되지.
내일을 넘길 수 없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쉬워질 수도 있다는 거야

20. 다만 상수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독설에 가까운 불평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거야, 라고 했던 정도만 생각났다. 상수가 그러면 너는 운이 나쁜 편이야? 하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지, 했던 말

21. 어느 날 상수는 해고는 불가피한 일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며 하는 대부분의 논평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은총은 "너는 소중한 걸 잃는다는 게 뭔지 모르는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런 걸 빼앗겨서 분노해본 적이 없나봐. 상수는 그 일이 생각나서 노트북에 은총은 분노해 본적이 있는 사람, 이라고 적었다

22. "몰라, 기억 안 나는데, 역시 그런 악당들 이름은 세상에 안 남는다. 그냥 그런 나쁜 놈이 있었구나, 하지"
"죄가 이름을 덮나봐"

23. 여름이면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런 날들을 보내고 나면 한살 한살 들어차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저 닳아 없어지기만 할 것 같았다

24. 그날 E의 집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장면이 없었다면 E를 추억할 공간이 오직 영화관과 전철역 플랫폼 그리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고 넘쳐나는 거리뿐이엇을 거였다. 그러면 경애는 E의 일부만 볼 수 있었던 것일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E를 볼 수 있었어, 라고 생각하면 자신감이 생겼다. 애도하고 그리워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자신감이었다

25.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상수에게 실패라는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준비된 듯 느껴졌다

26. 그런 형의 과시적인 육체는 형이 내내 저지르고 다녔던 숱한 폭력들을 떠올리게 해 불편했다

27. 아무리 꽉 엎드려 있어도 경애가 만들 수 있는 어둠에는 한계가 있었다. 완전히 어두워지지가 않았다. 손가락이나 머리카락 틈으로 친구의 긴 생머리, 누군게에게 적다 만 종이 쪽찌나 걷어올린 녹색 체육복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러면 경애도 가슴이 조금씩 뛰었고 어쩔 수 없이 뭔가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마음은 종종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경애가 온종일 엎드려만 있는 유령 같은 학생이라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마음이 너무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해 있었을 뿐이었다

28. 경애는 자기가 인생을 길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

29. 집에 놀러 왔을 때 된장찌개를 해서 밥상을 차려 줬는데 두부를 죄 골라먹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세상에서 두부를 두번 째로 좋아한다고 해서 첫번째는 뭐냐고 했더니 그건 경애와 먹는 모든 음식이라는 살가운 말을 했다. 나중에 경애 엄마는 서울 남자애라서 그런가봐, 하고 웃었다.

30. 상수는 집에서 나와 한참 걷고 나서야 자기 티셔츠에 적힌 단어가 'extinction', 멸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운명을 암시하는 말 같았다

31. 크레인을 동원해 무언가를 짓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세게의 어느 도시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들의 매장이 생겨났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관광을 왔다가 그 매장에서 또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의 상품을 사고 그렇게 이동해가는 사람들에게 스탬프처럼 찍힌 나이키, 아디다스, 샘소나이트, 노스페이스 같은 로고들은 또 낯선 풍경을 아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놓는 기능을 했다

정말 많은 구절들이 좋아서, 거의 모든 분야에 밑줄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밑줄을 남용하는 것이 옳은지 하며 읽었던 책이다. 경애의 삶이 경애스러워서, 상수의 삶이 상수스러운 것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책이라고 한줄 평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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