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imakemylifebeutiful 2020. 9. 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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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학생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읽고 의견을 나눠주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생각해보면,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2. 은희 방, 열린 방문 사이로 오빠의 구타 소리만 들려온다. 은희는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오빠에게 사정없이 맞기 시작한다. 퍽퍽, 오빠의 발이 은희를 짓밟는 소리. 은희의 신음 소리. 은희 ; 숨 쉴 시간 줘... 오빠는 몇 초 폭력을 멈춘다. 그 기묘한 정적. 그러고는 다시 때리기 시작한다. 전력을 다하여.

3. 은희 ; 김대훈이 저 때렸어요. 아빠는 피곤한 얼굴로 또냐, 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그냥 불쾌한 표정으로 식사를 계속한다. 엄마도 별말하고 싶지 않은 지친 표정이다. 오빠는 '쌤통이다'라는 표정으로 혀를 날름거린다. 아빠는 그 날름거림에 스, 하며 주의를 줄 뿐이다

4. 은희 ; 가끔 그런 생각한다. 내가 자살을 하는거야. 오빠 새끼가 괴롭혀서 힘들다고 유서 남기고... 근데, 그러면 내가 김대훈 새끼가 죄책감 느끼는 걸 못 보잖아. 그래서 죽고 나서 한 하루만 유령으로 있는 거야. 그 새끼 막 울고 아빠한테 혼나. 그럼 난 그걸 천장에서 다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엄마, 아빠 다 울고... 그러면 막 상상만 해도 후련해. 잠시의 침묵. 지숙 ; 다들 미안해하긴 할까? 은희, 지숙을 힐끔 본다. 두 소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잡한 얼굴로 옥상 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5. 은희야, 너 날라리가 되면 안 돼.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돼야 해. 그래야 무시 안 받고, 영어 간판도 잘 읽고 캠퍼스에서 책 가슴에 이렇게 끼고 돌아다니지 응?

6. 은희 ;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 성격 안 나빠! 나 성격 안 나빠!!! 나한테 이상하다고 제발 그러지 좀마!!

7. 대훈 ; 너 맞고 싶냐, 그만 안 해? 대훈이 때리는 시늉을 하자, 은희 바락 대든다. 은희 ; 때리기만 해 봐 이 개새끼야. 내가 너 신고할 수도 있는데 봐주는 거야!!!

8. 은희 엄마 ; 엄마는 은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은희 ; 나 사랑해?

9. 유리 ; 언니, 그건 지난 학기 잖아요.

10. 동네 창피하게(아빠가 제일 자주 하는 말)

11. 네가 좀 일찍 나왔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차라리 늦게 온 게 다행이라고, 내가 살았을 운명이라고. 아빠랑 싸우고 나와서 그래서 늦은 거였어. 아빠랑 말다툼 안 했더라면 그 버스 탔을 거야. 난 아침에도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빠가 내 생명을 살린 거야. 그 앞 버스를 놓쳤는데 그 버스가 사고 났어. 내가 살았을 운명이었어. 언니는 거듭, 자신이 살았을 운명이었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한다. 언니는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모를 표정이다.

12. 선생님,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13. 대훈 ; 가서 용돈 써. 이상한 기념품 사지 말고. 은희, 대훈의 용돈에 너무 놀라 피식 웃는다. 대훈, 은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14. 말투가 '불손하다'라는 이유로 내가 남자 교사에게 맞아서 기절했을 때, 좋아하는 친구가 갑자기 나를 차갑게 대했을 때,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빠가 자신의 분노를 아무 죄도 없는 내게 쏟아 냈을 때, 교실 창가에 앉아서 내가 앞으로도 영영 사랑 받을 수 없으리라고 예감했을 때, 어린 나의 고통은 어른이 된 나의 고통에 비해 조금도 사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생생했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안다. 고통은 파도처럼 마음에 들이쳤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쉼 없이 마음으로 들어와서 자국을 내고, 다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다가도 돌아온다. 나의 잘못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노력했는데도, 잘해 보려고 했는데도 겪어야 하는 상처들이 있다. 어른이 된 나는 상처받으면서도 내가 나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5. 은희와 내가 요구받았던 착함은 수동성이었던 것 같다. 누가 널 때려도, 부당하게 대해도, 맞서지도 싸우지도 말고 그저 참고 삭이고 너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칠게'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메세지가 '착함'이라는 규율로 여자아이들에게 강요되었다. 너 참 에쁘다, 너 참 착하다. 여자아이를 향한 이런 칭찬은 결국 여자아이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고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넌 네 의견을 잘 표현하는구나,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용기가 있구나, 네 감정에 솔직해서 좋다 같은 칭찬을 받아 본 여자아이가 몇이나 될까.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예쁘다, 착하다 같은 말 대신 우리 자신 그대로 수용되는 경험을 하고, 우리의 개성을 그대로 인정받았다면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16. '싸우지 좀 마'라는 말에는 '오빠라면 여동생을 대릴 수 있다'라는 승인이, '여자애는 남자가 때려도 참아야 한다'라는 주문이 들어 있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많은 여성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진위를 의심한다. 아파도 자신이 아픈 것이 맞는지 검열하고, 분명히 부당한 일을 당해도 자신이 '예민해서'가 아닌지 확인하고 확인한다. 여성의 고통을 고통이라고 언어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17.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의 아빠는 늘 그렇게 말한다.동네 창피해서.. 그리고 매일 죽도록 은희를 때리던 대훈은 수학여행에 가는 은희에게 용돈을 주며, 애정을 표한다. 고작 몇살 많은 중학생이 용돈을 주며 애정을 표하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나, 아빠에게 그대로 물려받았겠지. 그렇게 하면 자신은 착한 오빠가 되고, 동생을 때리는 것은 동생이 맞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 훈육의 한 갈래로 분류될 것이다. 싸워야지, 절대 지지 말자

 

벌새
국내도서
저자 : 김보라,최은영,남다은,김원영,정희진
출판 : 아르테(arte)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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