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박티팔 씨의 엉뚱하지만 도움이 되는 인간 관찰의 기술

imakemylifebeutiful 2020. 10. 6. 09:30
728x90

 

 

1. "어머~ 세 달씩 우는 건 심했지만 저 같아도 많이 속상하긴 했을 것 같아요. 베라 왕 드레스를 이리 고르고 저리 골라 몇 번이나 피팅했을테니까요. 게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한 거라면서요. 얼마나 열심히 준비 했겠어요. 드레스 끝자락에 불이 붙어 망가진 것도 속상했겠지만, 울면서 화장이 번진 것도 속상했을 테고, 어둥지둥하는 자신의 모습에도 속상했을 테고, 중요한 날에 불길한 징조가 있는 것 같아 또 한 번 속상했을 테고, 그러면서 결혼의 시작이 좋지 않구나 생각하며 속상했겠죠.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서 며칠 더 울었을 테고, 다녀와서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눈물지었겠죠. 남편을 볼 때 마다 안 좋은 기억이 다시 생각나 미운 마음이 들겠고, 결국 이 모든 걸 자신이 망쳤다고 생각하면서 더 속상했겠죠."

 

2. 누가 내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망설이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누워서 똥을 싸는 기간이 좀 짦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3. 보호자 면담 때 며느리가 들어와 "우리 시어머니는 젊었을 때 저를 엄청 괴롭혔어요. 정말 나쁜 분이셨어요"라고 말해 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시어머니께서는 매우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시며 힘들어도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첫 번째 뇌졸중이 왔을 때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내셨던 분"이라며 눈 밑을 떨면서 말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

 

4. (채용 면접 때 지원 동기를 '대출금 상환'이라고 답했다.)

 

5. 언젠가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잠든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아주머니를 봤다. 난 아이가 귀엽다고 말했도 그녀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어릴적 그녀는 엄마와 버스를 타면 잠들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 품에 잠든 아이를 보면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잠들어 버리면 힘들어질 엄마를 생각하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닷서 살짜리 밀랍 인형을 잠시 생각하다가 마음이 선선해져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6. 어디가 아파서 진료를 봤는데 의사 선생님이 컴퓨터에 뭐라 뭐라 적으며 설명하지만 못 알아듣겠다 싶거나 제대로 된 진단명이 궁금할 때, 진료를 마친 후 데스크에서 "여기 의무 기록 사본은 어디서 발급받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의무 기록실이라는 곳을 알려줄 것이다(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에서는 의무 기록을 따로 보관하고 관리하는 부서가 있다)

 

7. 하지만 진료 시간이 짧아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거나 내 질병에 대한 호기심 및 연구 욕심이 발동한다며 ㄴ이 역시 의무 기록실에서 자세한 보고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8.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별 가치가 없어지는 것 같다며, 늘 최대의 생산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9. 엄마한테 맞고 자라다가 오빠한테 맞고 나중에는 남편에게도 맞은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10. 뒤늦게 남편에게 카톡을 했더니 바로 전화가 와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전화를 하지, 왜 그러지 않았느냐고 다그쳤다(그는 위로를 해야 할때 다그치는 버릇이 있다.)전화를 해서 뭐 어쩌란 말인가.

 

11. 친정에 며칠 다녀온 뒤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을 다그치는 시어머니께 "저는 어디 갔다 와서 왜 전화를 꼭 드려야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라고 말해, 이번에는 시어머니를 기절시켰다. 아직도 왜 전화를 해야 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개념을 탑재해, 이제는 어딜 다녀오면 꼭 안부 전화를 드린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보고 싶을 때, 생각날 때만 전화를 드리고 싶기는 하다.

 

12. 티팔이는 조금 '사색적'인 거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여섯 살 아이가 사색적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여섯 살에 도대체 뭘 사색할 수 있단 말인가.

 

13. 엄마는 세상에서 사랑이 제일 쉬웠어. 엄마도 아빠가 좋고 아빠도 어마가 좋다고 하니 이보다 더 쉬운게 없었지.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밀당하지 말고 직진해라. 서로 직진해서 "사랑이 제일 쉬웠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14. 사람은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가려서 말할 줄 알아야 되는 거야.

 

15. 할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더니 결국 엄마에게 져 주셨어. 원래 부모는 자식에게 질 수박에 없는거야. 네가 맘에 안드는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와도 엄마가 져 줄게. 대신 방을 하나 구해줄 테니 몇 달만 좀 같이 살아 봐라.

 

16. 원래 고향이 바닷가 근처인 나는 잠실 롯데타워같이 높은 건물이 싫었다. 늘 북적북적한 서울은 오래도록 살 곳이 아니며, 늙으면 목포나 통영처럼 마닷가가 보이는 곳에 내려가 살아야지 생각했다

 

17. 대충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커피나 맥주를 사서 백제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난 이제껏 이만한 노을 명당을 본 적이 없다. 체육관 공터에 아이들을 풀어놓고 노을을 보고 있으니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8. 지난번에 우리 집에 방문했을 때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하시기에 "아버님, 잔소리는 하루에 한 개 씩만 하시면 안 될까요? 오늘 벌써 일곱 개 하신 거 같은데.." 라고 했더니 어이없어 하시며 그냥 웃었다.

 

19. 2년째 개인 상담을 받던 날, 상담 선생님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다.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못한 나의 모든 치부와 치욕을 다 이야기하며 바보처럼 울어대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들자 그제야 상담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선생님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여성'이라는 것 밖에 없다. 이러한 나의 마음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상담 선생님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선생님의 나이는 어떻게 되고, 결혼은 했는지, 남편이나 자식은 있는지, 그런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물어봤고 선생님은 친절히 답해 줬다. 이러한 대답에도 성이 차지 않자, 우리의관계가 가자이며 매우 불완전한 관게라고 주장했다. 나는 진실하며 실제적인 관계를 원하는데 선생님은 이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관계에 만족하는 분인 것 같아 슬프다고 말했다.

 

20. 또 다른 상담 날에는 "선생님은 돈 때문에 저를 상담하는 거에요? 저 늦게 오거나 안오면 '오예~!'하세요? 아니면 기다려지세요?"라고도 물었다가, 또 어떤 날에는 "선생님, 상담 시간 말고 다른 날에 제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라고도 물었다. 선생님은 "그냥 뭐 나도 가끔 티팔씨가 생각이 날 때가 있지요. 그렇지만 매일매일 티팔 씨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라고 굳이 뒷말을 보태 약을 올렸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이 실제로 내 근처에 있다면 정말 부담스럽고, 기피했겠다 생각이 들면서도 (그분도 나를 기피하려나ㅋㅋ) 어떤 면은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역시 친구들 말처럼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내가 늘 상담사를 주변에 두며, 상담하는 일을 업으로 꿈꿨음에도 고 하지 못한 이유. 난 상담이란 것이 필수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피상적인 관계에서 힘을 얻어가는 내담자도 있겠지만, (정말 그만큼의 위로도 기대할 관계가 주변에 전혀 없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 많이 웃었다. 책 읽으면서 풉풉하는 게 쉽지 않은데,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생각을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가서 너무 웃겼다. 가독성도 좋아 술술 읽히는 것은 덤이다.

 

정신과 박티팔 씨의 엉뚱하지만 도움이 되는 인간 관찰의 기술
국내도서
저자 : 박티팔
출판 : 웨일북 2020.03.14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