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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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by imakemylifebeutiful 2021.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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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나이쯤 되니 내 주변에서도 일에만 몰두하는 '회사 인간'을 보곤 한다. 분명 스스로는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데 겨과는 다르게 드러난다. 그가 가족을 위해 일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은 그가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돈 벌어 오는 하숙생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데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른다. 심지어 그런 사람은 회사에서의 습관이 몸에 배어 가족을 부하직원 다루듯 대하기도 한다. 이 환자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그를 편히 여길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 증오해도 모자랄 만한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이 끔찍해서, 미운 부모라도 자식인데 할 바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3. "자, 당신의 남은 날은 ㅇㅇ 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4. 택시 몰면서도 매일 소풍 나오는 것 같아요. 날씨 좋은 날은 손님이 없어도 그냥 드라이브 여행 다닌다고 생각해요. 손님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혼자 드라이브 다니는 거고, 그러다가 배고프면 기사식당 맛있는 데 찾아가서 밥 먹고요.

 

5. 남들은 택시 운전한다고 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이 나이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 몇 개 안 돼요. 이 일이 좋은 게 정년이 없거든요. 택시 운전한다고 함부로 다해는 사람들 보면 속으로 그래요. '너는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내 나이까지 일할 수 있나 보자'하고요.

 

6. 저희 집은 제사도 다 없앴어요. 며느리들이 싫어하는 건 눈치 보게 되더라고요. 아니,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중요한데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들이 싸우더라니까요?

 

7. 나는 유서도 다 써놨고 죽으면 화장해서 강가에 뿌리라고 했어요, 죽은 사람 챙기지 말고 그냥 너희들끼리, 산 사람들끼리 즐겁게 지내라고요. 나중에는 지들도 그러고 싶대요.

 

8. 사는 건 왜 그렇게 잔인한 일인지. 그렇게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모아놓으면 친척 중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돈을 가져가버렸다. 그들은 어린 조카의 등록금을 가져가서 자신의 생활비로 쓰는 듯했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세상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돈을 뺏긴 내가 어리석었다. 친척이든 누구든 간에 내가 번 돈은 뺏기지 말고 악착같이 버텼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아무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맞서 싸우며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알았더라면 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9. 핏줄들은 하나같이 나를 괴롭혔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세상이 마냥 더럽고 험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세상에는 그래도 아직 온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핏줄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배웠다.(그것은 내가 살면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중 하나다.)

 

10. 잔인한 생의 굴레가 또 누군가를 얽매지 않기를 바라지만 데자뷔 같은 느낌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잔인한 생도 생이어서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는 점이다. 

 

11. "나빠지면 할 수 없죠, 뭐. 그래도 저는 이 정도면 괜찮게 살았어요. 나쁜 짓 안 하고, 욕먹을 짓 안 하고 남 해코지한 적도 없고, 애들도 잘 키웠고. 아쉬운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잘살았다 싶어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치료는 할 수 있는만큼 열심히 잘 받으면 되고 즐겁게 살다가 때 되면 가면 돼요."

 

12. 다만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 이점을 오해하면 결과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커져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면 내가 열심히 치료받겠다는 조건부 긍정이 되기도 한다

 

13. '오래오래'는 아니었지만 '죽을 떄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침표를 찍었으니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결말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14. '600명 중 한 명'과 '단 한 사람', 이것이 그가 느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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