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본문 바로가기

옥상에서 만나요

by imakemylifebeutiful 2021. 6. 23.
728x90

1.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상의해서 생략했던 그 모든 과정을 결국 다 해야만 했다. 자포자기 상태로 드레스를 골랐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2. "생활 동반자 보호법이 빨리 통과되어야 할 텐데. 요즘은 내가 원했던 것도 사실 결호닝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는 동거가 아니었나 싶더라고."

3.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왔는데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신경 쓰였다. 친구의 우울을 감지한 지 좀 되었다. 변화가 없는 사회는 아니지만, 변화가 느린 사회라서 친구가 지쳐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오지 않는다해도 섭섭해 하지 말아야지. 여자는 마음먹었다.

친구는 사진을 찍을 때에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

"아니야, 와준 것만 해도 고마워."

잠깐 손을 잡았다 놓았다. 장갑 위로 감촉이 오래 남았다.

4.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스물한번째 여자의 남편은 빈정거렸다.

"그렇게 매사 우울해서 어떻게 사니? 차라리 약을 먹어라, 응?"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너는 이해 못해."

5. 마트 앞에서 크게 싸웠다.

"와, 홈패션 배우고 싶어. 수강료도 안 비싸고 좋다."

여자가 마트 문화센터의 수업 소개 게시판을 보다가 말했을 때, 남자가 쏘아붙였다.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갔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 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6. 여자의 친척이 성당에서 하는 예비부부 수업을 추천했고, 곧이어 남자의 친척이 절에서 하는 수업을 추천했다. 종교가 없는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네? 결혼을 절대 안하실 분들이 결혼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러 가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저런 애였지, 라는 뒷말을 듣고 말았지만 여자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7. "어쨋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8.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아이를 낳으면 설마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운 채로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보았다.

9.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10. 내 이름을 효도 효에 다할 진으로 지은 것부터가 이기적이지 않아? 신생아에게 그런 명령어를 입력하다니 너무하잖아.

11. 띄엄띄엄 돌아갈 때마다 마음이 누그러지기는커녕 거기가 내 집이 아니란 것만 더 확실해졌어. 스무살 떄부터 나의 끝없는 불효가 시작된 셈이야.

12. 집에 돌아와서는 언니의 칫솔을 버렸다. 매일 아침 거기 언니의 칫솔이 있었고, 아빠도 엄마도 그 칫솔을 계속 보고 있었을 텐데 아무도 버리지 않아서, 나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버려버렸다.

13. 언제나 마지막엔 남자를 생각할 줄 알고 있었다. 남자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남자 곁에 있어도, 다른 사람 곁에 있어도 결국 끝에는 남자를...... 수십년쯤 여유가 있으리라 착각했을 뿐 항상 알았다.

14. 잘하고 싶었다기보다 눈에 띄게 못하고 싶지 않았다.

15. 아영은 이재와 경윤이 가까운 동네에 사는 걸 질투했다. 다 함께 모였을 떄,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다. 게다가 그 내용이라는 게 반찬 만들기에 대한 시답잖은 정보들인 것도.

16.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위에 언급한 대로 남성도 가부장제에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여성과 다르게 제도의 수혜를 누리는 경우도 일상다반사다. 남성이 여러 사안에 둔감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젠더적 특혜다.

17. 세간에서 정세랑 소설은 대개 소소하고 귀여운 서사라느 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것을 만만하거나 하찮다는 뜻으로 ㅏㄷ아들이면 안된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피프티 피플>, <지구에서 한아뿐>을 봤고, 보건교사 안은영도 보았다.

평론가가 언급했듯, 또 세간에서 말하듯, 다소 가볍고 창의적인 컨텐츠가 엮이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순 그보다는 늘 알파가 있는 책이라 인기를 얻는다 판단했다.

이번책 또한 그랬고.

<출판사 창비>

2021.05.12 - [책] - 빛의 호위

빛의 호위

1.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2. 그녀와 알마 마이어의 겹쳐진 경

sunaworld.tistory.com

2020.12.23 - [책] - 아몬드

아몬드

1. 매일매일 아이들이 태어난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축복받아 마땅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누군가는 군림하고 명령하면서도 속이 비틀린 사람이

sunaworld.tistory.com

2020.11.30 - [책] - 선량한 차별주의자, 이 책을 차별에 대한 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가?

선량한 차별주의자, 이 책을 차별에 대한 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가?

2020/10/10 - [책] - 그건 혐오예요 1.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

sunaworld.tistory.com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영이의 거짓말  (0) 2021.06.25
묘한 생각들  (0) 2021.06.24
시간의 모서리  (0) 2021.06.22
방금 막 나를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빤히 바라보는 것이다  (0) 2021.06.21
불안  (0) 2021.06.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