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부탁
1. 사방에 불그스름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나는 더 걷기가 싫어서 쭈그리고 앉아 파도 소리를 들었다.
처업, 처업, 처업.
거대한 동물이뭔가를 천천히 먹어 치우는 소리 같았다.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들이 모래밭에 쏟아 놓은 얘기들이 바다의 배 속으로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2. 어릴 떄 나는 아무 의심 없이 해를 빨간색으로 칠하곤 했다. 해를 한 번도 자세히 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그럴 수 있었다. 하늘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고 그 아래로 불긋불긋한 물결들이 울렁대며 퍼져 나갔다. 낮게 깔린 구름 위로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해는 눈부신 노란색이었다.
3. 돈이 없으면 기분이 더러워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 먹을 때도요. 돈 몇백 원이 뭐라고, 사실 그거 조금 아낀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다 아는데, 모르지 않는데, 그래도 꼭 더 싼 걸 집게 돼요. 내가 또 싼 음료수를 마시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순간 기분이 안좋아지고 그러면 또 혼자 막 생각해요. 나는 처음부터 이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고, 절대 돈 아끼려고 그런게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요, 제가 처음에 뭘 좋아했는지 점점 헷갈리게 돼요. 꼴랑 음료수 하나 마시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죠? 저는요, 이런 게 더 미치겠어요. 내가 나를 자꾸 쪼그라들게 하는 거요.
4. 제가 예전부터 느꼈는데요. 사람들이요, 좀 잔인해요. 공부 잘하는 애가 잘못되면 아이고 아깝네 어쩌네 난리를 치면서 우리 같은 애가 사고 나면요, 보험금 얼마 받았냐고, 그래도 부모한테 효도는 하고 갔네 그래요. 정현이가 공부 잘 못한 거 맞고요. 남들 공부할 때 배달 일 다닌 것도 맞는데요. 그래도 나는 정현이가 아까워요. 걔 인생이 아까워서 미치겠어요.
5. 저 있잖아요, 정현이가 고백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한 적 있어요. 큭, 저도 제가 웃긴 거 알아요. 그런데 정현이 눈빛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얘는 언젠가 나한테 고백하겠구나. 눈빛이요? 그냥, 그런 거 있어요. 내가 걔한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눈빛. 내가 조금만 얼굴을 찡그려도 왜?하고 바로 물어봐주고,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나를 보고 있는 걔하고 눈이 마주치고, 다른 애들한테는 절대 안 하는 얘기 나한테만 해 주는 것 같고, 뭐, 그런 순간들이요.
순식간에 읽어내려간 글들.
어느 곳에 사는 아이들의 이야긴데,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슬펐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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