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1. 아파트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집에 와 티브이를 켰는데,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신문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발 디딜 면이 점점 줄어드는 공간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오래 버텨야 하는 게임이었다. 참가자들은 서로의 몸에 엉긴 채 용을 쓰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싿. 그러다 몇몇은 결국 상대의 무게를 못 이겨 신문지 밖으로 넘어지며 탈락했다. 그땐 그냥 티브이 앞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낄낄댔는데, 요즘은 내가 그 게임 참가자가 된 기분이었다. '반의반' 또 '반의반의반' 크기로 접힌 종이 위에 외발로 선 채 가족을 안고 부들부들 떠는. 그렇지만 결국 살았다고 카메라를 보며 웃는. 대학 동기들은 내게 벌써 집 장만을 했냐며 부러움 섞인 축하를 건넸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봤자 하우스 푸어"라고 겸연쩍게 변명했다. 한 녀석은 "나는 그냥 푸어인데 그래도 너는 하우스 푸어니 얼마나 좋냐"고 받아쳤다.
2. 할머니는 대답 대신 볼우물이 깊게 패게 담배를 빨았다. 담배 연기가 질 나쁜 소문처럼 순식간에 폐 속을 장악해나가는 느낌을 만끽했다. 그 소문의 최초 유포자인 양 약간의 죄책감과 즐거움을 갖고서였다.
3.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암에 걸린 강아지 에반이 어떻게 될지 겁이나 책을 쉬이 읽지 못했다. 갑자기 죽어버릴까 싶은 두려움과, 글이 주는 무거움을 한번에 감당할 수 없었다. 강아지는 주인에게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어딘가 구석에 머리를 콕 박은 채 마지막을 보낸다는데, 혹시 집 구석에 있던 것은 아닐까하는 끈임없는 생각속에서.
찬성이 에반에게 무책임했던 걸까? 중학생, 어쩌면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맞딱뜨렸을때, 생명의 고통에 대한 무게를 잴 역량이 있었을까.
죽여달라는 듯이 차로 들이받은 에반의 의중은 결국 확인하지 못하게 되었고, 찬성도 그게 에반이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
4. 그래서 한때 내게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싫어하게 만든 뒤 자기 혼자 사랑하려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와 헤어진 후 어머니는 비난의 대상을 주의 사람들로 바꿨다. 저 여자 머리가 왜 저런지 모르겠다, 저 아저씨 밥을 너무식하게 먹지 않니, 애를 저렇게 입히면 어쩌니. 다른 이들의 사소한 결점을 헐뜯으며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5. 여느 무리가 그렇듯 그중에는 좋은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상한 식탐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면 반말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훈계하고, 식사 후 아무 할 일도 없으면서 새치기하고, '찬밥도 위아래가 있다'는 장유유서 정신을 강조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다.
-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6.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 던지게 돼 있거든
영화보다 더 생생했던 소설이다. 가볍게 읽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한번 읽고, 두번 되뇌이며 이가 느끼고자 한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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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 [책]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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