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1. 왜 병든 사람들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
2. 나는 도착하자마자 뺨을 맞았다. 잠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그가 나를 더 때릴까 어림해봤다. 몇 대나 맞을까. 얼마나 더 이렇게 맞을까.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한 상태였다. 그저 실망스러운 어른들의 실망스러운 행동일 뿐. 아니, 실망스럽지도 않은 불행한 인간들의 가학 취미일 뿐이었으니까. 나는 떨어진 안경을 주워 쓰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었다. 머리가 울리고 굴역감이 일었지만 그 감정을 표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3. 가까운 친구 둘은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가서 자주 볼 수 없었고 대학에서는 마음을 붙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4. 어른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페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래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5. 다들 그렇게 혼자 서 있는 게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차라리 그게 좋아. 그렇게 서 있는 거지. 몇 시간이고 앞을 보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괴로움이 지나야 삶이라는 걸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요즘 해. 지나가기를 바라는 시간이 많았어.
6. 너를 사랑해서 그런거야. 너의 형도 아버지도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그게 다 사랑이라는 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골목 끝까지 걸어가 바닥에 침을 뱉었어. 입속에 고인 초콜릿의 단맛이 불쾌하게 느껴져서. 그 단맛이 입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서.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더러운 말이라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하고 또 경멸할 거라고 다짐했어.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7. 오랜만에 만나 조금 어색했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예전처럼 농담도 주고받고 좋았다고 모래는 말했다. 공무는 경찰서 생활에 대해. 모래는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고. 곧 다시 만나자고 웃으며 헤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모래가 말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그저 예전의 모방이었다는 기분이."
8. 나비야.
(중략)
언젠가 너한테 물었잖아 넌 왜 별칭을 나비라고 해느냐고, 네가 말했지. 나비는 세상 모든 이름 없는 고양이들의 이름이라고. 그냥 길 가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좋아서 나비라고 했다고. 화를 내면서, 악을 쓰면서 나비야, 나비야, 하진 않잖아. 라고. 그래서 나도 너를 부를 때 나비야, 나비야, 하고 어쩐지 다정하게 불렀던 것 같아.
넌 이름 없는 고양이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봉투를 뜯는. 이름 없느 ㄴ고양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기도 하는 그 길가의 애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9. "장난 아니야. 주나야. 오래 생각하고 말한 거야. 이게 나야."(중략) 진희는 왼쪽 가슴에 오른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 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지지 않게 막아내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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