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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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by imakemylifebeutiful 2021.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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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적)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거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

(중략)

 

2. 생선 장수의 노래

내 손을 거쳐간 펄떡임을 기억합니다

먼 바다의 이야기를 듣고

뜬눈으로 도착한 손님들

이제 나는 아무 동요 없이 그들의 목을 내려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를 발골의 귀재라 부릅니다

움푹 팬 도마나 휘어진 칼을 자랑처럼 내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피 묻은 장화를 보려 하는 이는 없어요

내가 더이상 누구의 눈도 들여다보지 않는 것처럼

 

한때는 수천의 심장을 따로 모아 기도를 올린 적도 있지요

다음 생엔 부디 너 자신으로 태어니지 말아라

내가 주는 것이 안식이라는 믿음

시간은 무자비하게 나를 단련시켰고

 

어쩌면 자비였을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영혼이라는 말은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꿈속에선 심해를 헤엄치게 될까요

머리를 내려칠 때마다, 심박수가 파도를 만들어 낸다는 목소리가

꼬리를 내려칠 때마다,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라는 목소리가

멈추질 않고

 

손에선 비린내가 가시지 않습니다

어떤 물을 마셔도 바닷물을 맏아 마신 듯 입이 쓰고 갈증이 납니다

 

아침저녁으로 피를 씻어내는 일이 나의 묵상입니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씻기지 않는 것들이 끝내 나이겠지요

 

지금껏 나는 수없이 나를 죽이고

토막난 자신을 마주해왔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3. 한달쯤 뒤에 나는 이 미스터리의 답을 찾았다. 어느저녁, 목소리를 다시 들은 거였다.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을 수십번 반복하며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 (중략) 아이와 함께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결코 아이를 다그치지 않았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옷을 벗기고 입혔다. 그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모르는 게 맞고 알 수도 없을 테지만 알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혹여 오더라도 아주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서글픈 직감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시집은 늘 어렵다. 가볍게 읽고자 시작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켜켜이 쌓이고, 집중해서 읽자니, 그도 딱히 쉽지는 않다. 

 

<출판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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