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렇게 정신이 맑은 상태가 된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대답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흔치 않은 병을 앓는 특별한 아이이고 싶었다. 보육원에서 자란 유기아동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은 데다 함묵증까지 보태서 곽은태 선생님이 밤잠을 설치며 내 걱정을 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해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2. 나로서는 그런 평범한 가족 간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사랑하고 있을까? 지친 얼굴로 시선을 TV에 걸쳐둔 젊은 여자의 가슴속에는 지금 엄마의 사랑이란 것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일까?
3. 우상초등학교로 전학 온 뒤로 이모는 내 옷들을 유난히 자주 빨았다. 내 행색이 어떻다는 뒷말이 나올까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하지만 옷들을 아무렇게나 한꺼번에 세탁기에 넣고 돌린 탓에 흰옷들은 조금씩 어둡게 물들어갔고 빳빳하던 옷감들은 힘을 잃어갔다. 앤더슨 부인이 준 예쁜 옷들이 벌써 낡은 옷처럼 후줄근해지고 있었다. 나는 원하는 옷을 입지 못하고 생일파티에 왔다.
4. 정말이지 속상한 날이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너무 힘겹게 찾아오고 너무 쉽게 사라졌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5. 담임이 세계를 보라고 하자 아이들은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것들을 앞다투어 찾아왔는데 나는 하필이면 또다시 가장 깊은 가난을 보고 말았다. 인터넷을 뒤져서 세계의 괴상한 고층 건물 사진이나 몇 장 출력해오고 말 것을, 무엇 하러 시장까지 찾아가서 그런 취재를 했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 나에게 국제중학교라니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6. 나도 곽은태 선생님의 친딸이었다면 시현이처럼 문짝에 발길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시현이 왜 매일 반쯤 미쳐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와이파이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7. 시현 엄마는 그날그날 달랐다. 어떤 날은 와이파이가 켜지고 어떤 날은 꺼지고, 어떤 날은 스마트패드를 허락하고 어떤 날은 금지했다. 어떤 날은 웃으며 달래고, 어떤 날은 야단치며 빼앗았다. 나는 그날의 학원 과제와 시현의 기분과 곽은태 선생님의 표정과 날씨와 벡터의 배변과 시현 엄마가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까지 모두 종합적으로고려해 오늘이 어떤 날인가를 점치게 되었다. 내 몸에 무수히 돋아난 촉수에도 불구하고 적중률은 높지 않았다.
8. 곽은태 선생님은 아들의 그 멋진 공연을 보러 오지 않았고 시현이 엄마는 그런 공연 따위는 암것도 아니라고 울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바닷가재 레스토랑에서 시현이 바닷가재가 맛없다고 삐죽거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들은 각각 최고의 것을 눈앞에 놓고도 그건 하나도 좋은 게 아니라고 손발을 내저었다. 가족이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이다.
9. 사실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같아. 그게 그렇게 무서우니까 세상엔 그렇게 많은 거짓말들이 있는 거겠지.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다 이해해. 너무너무 이해해. 나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미치겠거든.
10. 원장님이 돌아가셨다. 요양원의 칠순잔치가 어떻게 되었냐고 네가 지나가듯 물어보았을 때 나는 또다시 이 세상의 모든 거짓말을 다 하고 싶어졌어. 머리가 나쁜 사람이지만, 이것저것 둘러댈 수 있었겠지. 칠순잔치엔 미국에 사는 동생들이 찾아왔고, 형제들이 의논한 끝에 원장님을 미국의 더 좋은 요양원에서 모시기로 햇다거나. 네가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또는 그보다 더 오래 나는 거짓말로 너를 속일 수 있었을 거야. 아코가 통백리에서 뛰놀 듯이, 원장님은 미국에서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겠지.
11. 사람이 일하느라 바쁠 때는 늘 그런 법이야. 주변에 사람이 많고 시간이 없지. 그러니 외롭다고 느낄 이유도 시간도 없어. 하지만 일이 끝나면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날 일도 없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계속되지. 사람이 외롭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단다. 사랑하는 사람은 할 일이 있어서 만나는 게 아니거든. 그냥 보고 싶으니가, 마음이 쓰이니까 만나게 되지.
12. 그러면 원장님도 그렇게 하세요! 방송을 불러서 이렇게 입이 비뚤어진 모습도 다 보여주시고, 형제들도 하나도 안 오지만 자랑스럽다고, 당당하게 말씀을 하시라고요! 기부금을 많이 받아서 미국에 가시면 되잖아요! 그 순간 접견실에 흐르던 정적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겟구나, 설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았는데,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해버렸다는 걸, 나는 지금까지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어, 분명히. 그리고 그 순간 원장님의 마으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부러져버렸다. 내 귀에 그 우두둑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어.
13. 이건 뭐지. 남의 집 아이들에겐 사실을 말하고,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 자식에게만 거짓말을 한다는 건 대체 뭐지. 나는 이제 무엇이 참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14. 통백식당 아줌마의 말처럼, 나는 독하고 은혜를 모르는 계집에가 맞을 것이다.지금까지 이모가 나를 키워준 건 하나도 고마울 게 없다는 듯 나는 이모를 마음껏 미워했다.
15. 하지만 이모에게 심술을 부리는 건 이모가 나를 다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고, 그 확신이 너무너무 달콤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아이는 그런 흔들림 없는 터전을 만나면 발을 쿵쿵 굴러서 그 튼튼함을 확인하고 내심 기뻐하곤 한다. 그리고 이모는 바보 같으면서도 어딘지 귀신 같은 데가 있어서, 내가 진짜 상태가 안좋을 땐 정말 어쩔 줄 모르지만 이렇게 괜한 투정을 부리면 저런저런 하면서 장단을 맞춰줄 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16. 이모에게 자꾸 심술을 부리는 건 늘 바보 같은 이모가 화낼 줄도 모르고 이렇게 오냐오냐해주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7. 이모에게는 식사와 디저트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납골당에 오가는 길 내내 시달린 김밥과 짜장라면과 돼지불고기와 파김치와 케이크가 한 밥상에 모두 올랐다. 라면이 담긴 그릇들은 모두 짝이 맞지 않았고 절반은 사은품이었다.
18. 어른들은 부모의 사랑이니 어른의 지혜니 여러 가지 그럴싸한 소리들을 갖다 대면서 실은 아이들에게 '넌 아직 어리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곤 한다. 사나운 아이들은 이런 위선적인 일방향 소통을 거절하기로 결심한 아이들이다. 자기 생각이 있고, 그 주장을 펼칠 용기가 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깽판조차 불사할 결의가 있는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사나운 아이들의 용기와 에너지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침묵하는 착한 아이들이 억누르고 있는 감정과 욕망들을 밝고 안전한 곳으로 꺼내주어야 한다.
곽은태 선생님과의 행복한 가정을 꿈꿀 때마다 설마 진짜로 가족이 되겠어, 했는데 가족이 되어 조금 놀랐다ㅋㅋ
다만, 가족이 되어도 뻔하지 않아 좋았고
그다지 어렵지 않은 배경과, 너무 가볍지 않은 주제라 좋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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