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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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by imakemylifebeutiful 202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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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픈 걸 참지 말고 그냥 입원을 할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병동에서는, 옆자리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사람의 죽음에는 드라마가 없다. 더디고 부잡스럽고 무미건조하다.

 

2.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3. 시퍼렇게 된 양쪽 팔에 더 이상 주사를 맞을 혈관을 찾을 수 없어서 발목과 사타구니를 헤집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4.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5. 앞서도 말했지만 성실하지 않다는 건 내게 가장 큰 불명예다. 아무리 덜떨어져도 인사 잘하고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정작 어릴 때 들었을 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삶을 통해 신뢰하게 된 명제다. 대개 인사성과 성실함은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에서나 빛을 발하는 덕목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건 가장 끔찍한 오해들 가운데 하나다. 가진 것이 없을 때 저 두가지는 가장 믿을 만한 칼과 방패가 된다. 타인을 가늠하는 데도, 나를 무장하는 데도 좋은 요령이다.

 

6. 항암 중에 먹지 않으면 정말 죽는다는 협박성 조언이 떠올랐다. 살고 싶은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뒤뚱뒤뚱 걸어가 수저를 줍고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먹었다.

 

7.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붙이기 어렵다. 먼지가 들어가고 지문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확 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망치게 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먼지를 빼고 지문을 지우려다 아예 구겨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운이 좋은 아이들은 액정보호필름을 새 걸로 다시 사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아파하지 말아라. 시간 낭비다. 그냥 먼지와 지문을 참고 함꼐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배우면 된다. 부모가 사준 두 번째 기회를 누리는 아이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굴곡이 없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결점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반드시 삶에서 빛을 발한다. 그걸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8. 나는 여태 내 삶이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딱히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말이다. 백 명의 관객 가운데 두 명 밖에 웃기지 못한 실패한 농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이었다.

 

9. 집으로 돌아오 존 메릭은 평생 처음으로 제대로 누워 잠을 청한다. 그렇게 잠을 자면 질식해 죽으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존 메릭은 그렇게 죽었다.

 

10. "우리 병원에 오는 우울증 환자들 가운데 기혼자들의 9할은 배우자 때문에 우울하다."나는 멀쩡하게 결혼해서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함꼐 대체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만 같았던 이들이 대체 왜 이런가 싶었고,

 

11.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맹새했다. 나는 혼자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나는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선배도 없다. 혼자서 해내지 못하면 그냥 끝이다. 우습게 보여도 그냥 끝이다. 내게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다.

 

12. 4학년 때 취업한 이후로 여태껏 혼자 힘으로 몸을 굴려 밥을 벌어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달콤하며 떳떳한 노릇인지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13. 젊은 날의 나는 대개 불행했고, 앞으로도 불행을 떨쳐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잠식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사람은 거만했고, 거만해서 재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불행에 잡아먹히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골몰했다. 

 

14.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15. <스타워즈>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부패할 수 있는지,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에 관한 이야기다,

 

16. <스타워즈>는 의외로 진입 장벽이 높은 시리즈다. 마음먹고 에피소드 4편부터 보려고 해도 유치하고 산만하다고 느끼기 일쑤다. 무엇보다 이제는 시리즈가 너무 길어져버렸다.

 

작가가 유명한 책은, 그냥 그 유명세에 힘 입어 한번쯤 내 본 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반응이 좋으면 두 어번 더 내 보고. 그러나 허지웅 작가의 책은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항상 어떤 부분의 고찰을 적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기고, 읽으면서도 납득되고, 공감할만한 구절이 여럿 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계속 에세이로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급 영화 소개서가 되었던 점인데, 수필은 자기 삶에 대한 경험록이기에, 상상력을 첨가할 수 없어 소재가 한정적이라는 <죽음>에서 등장한 한 구절이 그 한계에 대한 근거가 되어준 듯하다.

 

 

살고 싶다는 농담
국내도서
저자 : 허지웅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20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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