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밧줄을 동그랗게 매달면 그 동그라미 너머의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했다. 마치 그쪽에서 누가 손짓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이다. "이 동그라미 바깥에선 고생할 필요 없어. 매 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병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돼." 남편이 자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따라가려고 밧줄을 무껑ㅆ는데, 밧줄 너머로 남편이 손짓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2. 예전에 병으로 사망한 한 남성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유치원생쯤 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죽은 아빠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친척 한명이 화를 내며 아이를 억지로 안아들며 말했다. "자식이 자기 아빠도 안 본다고 사람들이 흉본다! 무섭긴 뭐가 뭐서워? 지금 효도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온몸을 덜덜떨며 아빠의 시신을 보는 아이 옆에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이의 떨림은 멈추지 않아 엄마가 부축해줘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공포에 질려 있던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가끔 생각한다. 부모가 죽고 난 후에 보이는 행동으로 효자인지 불효자인지 따지는 게 제일 우스운 일이자 자기 자신을 속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이다. 도대체 '효도'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내가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보던 모습들이 진정한 효도이고 이곳 장례식장에서 보는 모습들은 조금 가짜 같다.
3. "왜 이렇게 부패가 심해요?" "집에서 사망한 지 한참 뒤에 발견됐대요."나는 병원에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봤다. 알고 보니 돈이 다 떨어지면 집에 돌아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였다. 맞는 말이긴 하다. 돈 있는 사람은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돈 없는 사람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건 원래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 번 맞는 말이다.
4.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이 내려놓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매일 찾아와 저런 당부를 한 거겠죠.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산 사람마저 내려놓지 못하게 돼버렸을 테고.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과연 모든 걸 내려놓았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겠죠.
5. 장례식장에는 '제일'비참한 사연이란 없다. '더욱' 비참한 사연만 있을 뿐이다. 누구도 자신이 제일 비참하다는 말 같은 걸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6.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
7. 그러자 문득 외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날 좋아한다는 여자들의 한 마디에는 온갖 비싼 물건을 사줬으면서, 날 키워주고 사랑으로 보살펴준 외할머니께는 어째서 그러지 못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삼시세끼 잘도 사줬으면서, 어째서 우리 외할머니께 그렇게 해드릴 생각은 못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량공세를 펼치며 내 필요성을 확인받으려 애쓰는 동안, 왜 어릴 때부터 용돈을 챙겨주신 외할머니께 효도할 생각은 못했는지. 내가 쓰레기 정도가 아니라 핵폐기물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좋은 물건이 생기면 제일 먼저 외할머니께 드린다. 늘 뭐가 필요하신지 묻고, 내가 가진 가장 큰 능력으로 외할머니를 좀 더 편하게 해드리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사랑이다.
8.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죽은 자의 집 청소>보다 가벼운 듯하지만, 더 끔찍한 책. 생각보다 생생한 묘사가 많아 약간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곳에서 더 새로운 생각을 얻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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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김영사의 책 더보기>
죽은자의 집청소
1. 콘돔이 생명의 잉태를 막듯 이런 보호 장구의 얇은 막이 나를 감염과 오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막아준다고 믿습니다. 2. 낯선 존재였던 엘리베이터는 선뜻 좌우로 품을 열고 정해진 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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