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쇳물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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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by imakemylifebeutiful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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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복을 빌며>

죽기 한 달 전에 그랬다

연락할 친구는 없고

연락 닿은 친구는 외면했다

 

일이 끊겼다

배가 고프다

체취 좋던 그녀가 떠오르는 고약한 하루

나를 때리던 아버지 산소에 가볼까?

엄마를 화장하지 말걸 그랬어

 

잔돈을 털어 소주를 샀다

차가운 기운이 배 속을 염하는 동안

여태껏 나를 울렸던 시름은

시시한 것이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눈물이 너무 많았다

 

뭔가 할 일이 있었는데

의식이 황급히 달아난다

아아, 화장해달라는 쪽지라도 남길 걸 그랬어

 

2. <키스>

노년을 아프게 하는 것은

새벽 뜬 눈으로 지새우게 하는

관절염이 아니라

어쩌면

미처 늙지 못한 마음이리라

 

3. <명치>

만져지는 시란

어떤 느낌입니까

그 두텁고 무덤덤한 종이 위애

오돌토돌한 요철을 나열한 ㅏ음

느린 손끝으로 읽어내는 일 말입니다

 

가을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라고 읽는 일골목길에서 수없이 울었다, 라고 읽는 일딸이 세상을 떠났다, 라고 읽는 그런 일 말입니다

 

손끝에 만져지는 슬픔이란어떤 느낌입니까혹시 잠 못 드는 밤명치 끝에 만져지는 그것은 따님의 이름입니까

 

4. <체리와 장군>아버지 때처럼오늘도 더웠습니다물려주신 가난은 넉넉했고요.

 

체리를 훔쳤습니다피치 못할 사정을 읍소해보고도 싶지만나라님은 알 바 아닐 테고가난에 관해서는 애기 끝났다 하실 테죠.

 

나라를 훔친 분들이 압수수색과 상관없이비밀 창고에서 예술을 논하는 동안에도 그깟 작은 열매나 탐한 자신이부끄러워졌습니다

 

돌아가 아이들에게벼슬 같은 가난을 세습해주어야겠습니다

 

5. 봄날에는 더나지 말자어린 순경 코 찌르지 않게동짓날 새벽에 떠나자더웠던 양홑이불 제쳐놓고보일러에는 열흘 치 기름을 남겨놓자노인네, 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하게

 

머리맡 일기장에는 살 만큼 살았다는 양복에 겨운 푸념을,제일 뒤장에는복지사 미안해하지 않게천상병의 귀천을그러나 쓰다 말자꼭 떠나려던 것은 아닌 듯하게

 

그런대로 세상 살 만했던 양새끼들 욕먹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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