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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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by imakemylifebeutiful 202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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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원이는 회 아직 못 먹나?"

엄마가 답했다.

"안 먹더라고. 낯설어서 그런가."

"먹어볼래, 채원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모부가 히죽 웃더니 회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을까."

"한 점만 먹어 보자, 채원아."

이번에는 아빠였다. 나는 굳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짐짓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쓰읍, 하고 말 안듣는 아이를 혼낼 때나 하는소리를 내더니 작은 회 한 점을 집어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어른이 주는 건 먹어야지."

엄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이거 엄청 비싼 거다. 나중에는 없어서 못 먹을걸?"

이모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딱 한 입만 먹어 보자 채원아. 이모부가 힘들게 저 바다에서 잡아 온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허나 아이들의 거부는 쉽게 무시당하기 마련이고, 어른들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살점을 흔들었다. 투명하고 흰 살은 거대한 애벌레 같아 보였다.

 

2. 내가 더 빨리 집에 왔다면 달라졌을까?

내가 초밥을 사러 나가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전날 사과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면 달라졌을까?

집 안의 모드 과도를 버렸다면 달라졌을까?

어머니는 죽지 않고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굳이 사과가 아니어도 언젠가 무슨 핑계로든 어머니를 찔렀을 것이다. 나 역시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다. 동기나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언젠가는 벌어지고야 말일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날이 오늘이었던 것뿐.

 

3. 어제 하루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나는 늘 두려움에 떨며 골목을 걷지만 주위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 혼동이 됐다고. 하지만 당신이 어제 나를 도와줘서, 그토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줘서 이제는 헷갈리지 않는다고. 당신이 나의 증인이자 구원자라고. 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그냥 그렇다는 비유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좋다고.

 

4. 그 와중에 생선이 든 봉지로 아버지의 얼굴을 쳤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생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후려쳤다는 부분에서 이성을 잃었다. 본인은 생선보다 더한 것으로 우리를 쳤으면서, 고작 그런 것에 이성을 잃고 과도를 휘둘렀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하는 살인의 연계고리가 퍽 서운했다. 막아보려 돌려보려던 모든 일들이 사실 그 원인이었다니. 한 유튜버의 책 추천을 요새 이어 읽고 있다. 아직 <고시원 괴담>이라는 책이 한 권 남았는데, 사회적인 무거운 내용없이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들이라 신선하다. 유치하거나, 의미없다고 생각될 줄알았는데, 물과 숲의 이야기나 서로가 함께하는 드라마가 꽤 흥미롭게 읽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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