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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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by imakemylifebeutiful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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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만한 말이 없다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밖에 욕을 못 만드냐고 했다.

"참신한 욕이 필요해. 분이 풀리는 욕이 필요해."

그것이 지우의 결론이었다.

2.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떄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3.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4. "내가 하루에 먹는 약만 한줌이야. 근데 난 지연이 너랑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그런 소리 지겹지 않냐. 다 늙어서 손녀딸한테 아프다고 투정하고 그런 거, 난 싫다. 그런 할머니 안 해. 너랑 재미난 얘기만 할래."

5. "제가 읽어드리는 게 불편해서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자꾸 나한테 뭘 해주면, 내가 되돌려줄 게 없어서 문제가 생겨."

"할머니는 이야기해주시잖아요."

"네가 들어주는 거지."

"아닌데요."

나는 그 순간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꼈고, 서운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놀랐다.

6. 협의이혼 판결을 받으러 법원에 갔던 날, 대기실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나는 그를 만지고 싶었다.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당신을 용서했으니 이제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이 끔찍한 일을 그만두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를 포옹한다면 얼마나 안락할까, 얼마나 편안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라는 걸 알아서.

7.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 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 없어.

8.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9. 할머니는 증조부에게서 작은 선물 하나도 받은 기억이 없었다. 피난 갈 떄도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얇은 외투를 입고 떨어도 자신의 외투를 벗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증조부의 그런 행동이 너무 익숙해서 서운하지조차 않았다. 할머니와 남선의 관계는 그런 익숙함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10. "네 나이 때 나도 그랬어.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시간을 다 퍼다가 갖다버리고 싶었어.."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내내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면서도, 절대 보러 가지 못할 사람이 내게도 있다는 점이 슬프다.

외할머니가 정말 그립다.

할머니가 계셨다면, 이보다는 따뜻하고, 사랑하며 지냈을텐데.

내가 대화할 수 있고, 내 생각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한명도 없다는 일은 정말 처참하다.

세상에 응석부릴 상대가 없으면, 나는 더 가시를 돋는다.

내 가시가 더 곤두세워져야, 내가 나를 보호해야, 나는 더 비참한 곳으로 떨어지지 않을테니까.

<최은영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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