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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akemylifebeutiful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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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에는 훔친 물건들을 머리맡에 두고 눕는다. 모자로 얼굴을 덮고, 박스를 쌓아 벽을 만들어도 쉽사리 잠들 수 가 없다. 나는 살대가 부러진 우산, 밑창이 떨어진 슬리퍼, 구멍난 담요 같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적의를 굴린다. 주먹만한 그것이 얼굴만해지고 몸체만해질 때까지. 나는 분노와 두려움, 불안과 공포 위에 그것을 굴리고 또 굴려 어마어마하게 만든다.

 

2. 이곳은 젊고 건강한 내게 가장 인색하고 야박하게 군다. 내가 가진 것들이 대단하다고 여기기 대문이다. 이고셍 머무르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나를 부러워하긴 마찬가지다. 마치 굉장한 걸 가진 것처럼 생각한다. 소진해야 핼 젊음이 버겁도록 남았다는 게 얼마나 막막한 일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나는 세계가 모조리 무너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차라리 그런 비극 속에 있다면 절망감과 무력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도 다른 사람드로가 다를 바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고통을 느끼고, 죽어가면서 우리도 여기 이렇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인가. 여자와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다 무너졌는데. 이토록 또렷하게 망가진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여자와 나는 스스로를 가리고 숨길 얇은 거짓 하나조차 걸칠 수 없다. 언데나 모든게 발가벗겨진 상태로 서로를 향해 각을 세우고 할퀴고 흉터를 남긴다.

 

4. 그게 왜 강제가 아닌가.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게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게 강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5. 여자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므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단언한다. 가진 것이 없으면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나.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나. 그렇다면 그건 차라리 공평한 관계가 아닌가. 그는 왜 이 광장에서 우리를 내쫓으려고만 하나. 여자와 내가 광장에서 삶을 허비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6. 너 가장 나쁜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니? 바랄게 없다고 생각하게만드는 사람이다. 그게 가장 나쁜 거야. 이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건 서로를 망가뜨리는 거야.

 

7. 모르는 사람 앞에 빈 손바닥을 내밀어본 사람은 안다. 그 손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치르고 얼마간의 돈을 쥐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거리에서 한번 잃은 것은 되찾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을 영원히 잃는 대가라면 우리가 받는 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잃을 게 없을 때까지 잃고 또 잃고 마침내 다 잃은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8. 그애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분고분 대답한다.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짜증스럽게 만든다. 저런 순진한 얼굴로 여러 사람에게 이용만 당해온 그애의 멍청함에 화가 난다.

 

9. 나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쥐고 다른 손으로 벌린 입을 가리킨다. 더러운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절룩거리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

봐라, 당신들의 삶이 얼마나 윤택한다. 당신들의 일상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지금 당신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굽실거리며 비참하고 구역질나는 내 삶을 다 보여준다. 얼마라도 좋으니 제발 값을 쳐달라고 애원한다. 동정이든 경멸이든 뭐든 상관없다. 나는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인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아무에게나 손을 내민다.

 

노숙자에게 사랑이 사치라며 써진 책이 참 심란했다. 어차피 남의 것이었던 그리고 큰 쓸모도 없는 몇 물건을 밤새 지켜내기 위해 적의를 뿜는 밤. 더 나은 곳으로 가야지, 하는 희망보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자유롭다 여기는 삶.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것도 내걸 것이 없어 모멸감이나 수치심 따위를 팔아 버린다. 더 밑바닥이 없을 것 같을 때, 더 밑바닥이 있다는 사람들이, 서로 가진 것이 없으므로 나눌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이 꽤 섬뜩했다. 가져야만 나눌 수 있는가에 응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기로에서.

 

김혜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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